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대만의 한 가족의 이야기, 영화 <비정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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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대만의 한 가족의 이야기, 영화 <비정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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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개요: 일본 패망 후 사진관을 운영하는 가장과 네 아들 인생 역정

 

* 작품 개요
<비정성시>(悲情城市, A City of Sadness)는 1989년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이 연출한 대만 영화입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대만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화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 국민당 정부의 통치 아래 벌어진 '2.28 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지룽(基隆) 지역의 린(林) 씨 일가의 흥망성쇠를 통해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무력함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억압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를 묵묵히 응시하며, 역사 속 개인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 깊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배우 양조위(梁朝偉)가 청각 장애를 가진 넷째 아들로 출연하여 섬세한 연기를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감독: 허우샤오 센

출연: 양조위, 진송용

장르: 드라마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58분

 

대만 뉴웨이브 영화 선두격인 비정성시 포스터.
대만 뉴웨이브 영화 선두격인 비정성시 포스터.


* 줄거리
영화는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시작됩니다. 지룽에서 '샤오벤'이라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린 씨 집안은 아버지와 네 명의 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장남은 사업가로 수완이 좋지만, 불안한 시대 상황 속에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둘째는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돌아오지만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셋째는 상하이에서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넷째 아들 린원칭(양조위)은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친구 우관문을 통해 상하이에서 온 간호사 히미코를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은 이들의 소박한 행복마저 위협합니다.


국민당 정부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사회는 점차 혼란스러워지고,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지역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됩니다. 특히 1947년 '2.28 사건'을 기점으로 정치적인 탄압이 거세어지면서 린 씨 일가의 삶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체포되고 고문당하며, 사회 전체가 공포와 불안에 휩싸입니다.


인원칭과 그의 친구들은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려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함을 느낄 뿐입니다. 결국 린 씨 집안의 구성원들은 시대의 비극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고 스러져 갑니다. 영화는 이들의 엇갈린 운명을 통해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억압적인 시대 속에서 침묵해야 했던 사람들의 슬픔을 묵묵히 그려냅니다.


<비정성시>는 화려한 볼거리나 극적인 사건보다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선과 시대의 분위기를 담담하게 묘사하며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대만의 아픈 역사를 이해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슬픔과 희망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주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기력한 개인... 소통의 부재와 단절, 고립

 

1. 격동의 역사와 개인의 무력함
<비정성시>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격변하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입니다. 영화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 대만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일본의 패망, 국민당 정부의 통치 시작, 그리고 '2.28 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변화 앞에서 평범한 린 씨 일가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장남은 사업을 통해 가정을 일으키려 하지만 시대의 불안정함 속에서 점차 몰락하고, 둘째는 전쟁의 상흔을 안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셋째 역시 사업 실패를 겪으며 좌절하고, 청각 장애를 가진 순수한 영혼의 넷째 아들 린원칭마저 시대의 어둠에 잠식되어 갑니다. 이들의 노력과 소망은 격렬한 역사적 사건 앞에서 힘없이 부서지고, 관객들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영화는 특정 영웅이나 사건 중심의 서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역사의 비정함과 그 속에서 스러져가는 개인의 나약함을 묵묵히 보여줍니다.


2. 소통의 부재와 단절
<비정성시>는 언어와 소통의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다룹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거나, 청각 장애로 인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개인 간의 오해와 갈등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단절과 고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넷째 아들 린원칭은 청각 장애로 인해 세상과 온전하게 소통하지 못하고, 이는 그를 더욱 고독하고 내면적인 인물로 만듭니다. 그가 히미코와 필담을 통해 소통하는 모습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인간적인 교감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한, 본성어(대만어), 북경어,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가 혼재되어 사용되는 상황은 당시 대만의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며,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소통 부재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소통의 단절은 결국 개인적인 불행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3.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비정성시>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거쳐 국민당 정부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 대만의 상황은 사람들에게 국적과 문화적 소속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린 씨 집안의 장남은 사업적인 성공을 꿈꾸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모습에서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군에 징집되었던 둘째 아들은 전쟁 이후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낍니다. 넷째 아들 린원칭은 청각 장애라는 개인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뇌합니다. 특히,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토착민들 사이의 갈등은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를 더욱 부각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인물들의 방황과 고뇌를 통해 식민 지배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겪어야 했던 대만 사람들의 정체성 혼란과 상실감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4. 가족의 의미와 연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비정성시>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의미와 그 안에서 피어나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린 씨 일가는 각기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으며 힘든 시기를 견뎌내려 노력합니다. 아버지의 묵묵한 사랑, 형제들 간의 우애, 그리고 린원칭과 히미코의 따뜻한 사랑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인간적인 연결고리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대의 비극적인 흐름은 이러한 가족 공동체의 유지를 어렵게 만들고, 결국 가족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소박한 일상의 모습들은 잃어버린 평범한 행복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냅니다. <비정성시>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개인은 무력할지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지지하고 연대하는 인간적인 관계의 소중함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러한 소중한 가치마저 무참히 파괴하는 역사의 냉혹함을 씁쓸하게 드러냅니다.

 

 

■ 섬세한 연출, 주제의식 강력한 허우 샤오 센 감독의 다른 작품 3편 리뷰

 

1. <희몽인생>(戲夢人生, The Puppetmaster, 1993)
<희몽인생>은 대만 전통 인형극의 거장 리톈루(李天祿)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자전적인 영화입니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리톈루의 구술을 바탕으로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일본 식민 시대, 국공내전,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영화는 전통 인형극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격동의 대만 근현대사를 개인의 삶과 교차시키며, 역사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과 존재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극중극 형식으로 펼쳐지는 인형극 장면들은 리톈루의 삶과 묘하게 겹쳐지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긴 호흡의 정적인 화면 구성과 절제된 대사는 관객에게 마치 한 편의 잔잔한 수묵화 같은 인상을 주며, 리톈루의 삶의 굴곡과 그 속에서 묻어나는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희몽인생>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허우샤오셴 감독의 예술적 성취를 다시 한번 세계에 알린 작품입니다.


2. <호남호녀>(好男好女, Good Men, Good Women, 1995)
<호남호녀>는 1940년대 중국 본토에서 활동했던 대만 출신 여인 샤오징(蕭紅)의 삶과 1990년대 대만을 살아가는 배우 량징(梁靜)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과거와 현재, 현실과 영화 속 허구를 넘나드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영화입니다. 샤오징은 격동의 시대 속에서 사랑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실존 인물이며, 량징은 샤오징의 삶을 다룬 영화에서 그녀를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영화는 샤오징의 비극적인 삶과 량징이 겪는 개인적인 고뇌를 병치시키면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여성으로서 겪는 보편적인 슬픔과 상처, 그리고 삶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특히, 량징이 과거의 인물인 샤오징을 연기하면서 겪는 내면의 혼란과 성장은 영화의 중요한 축을 이룹니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실험적인 편집과 촬영 기법을 통해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관객에게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합니다.


3. <밀레니엄 맘보>(千禧曼波, Millennium Mambo, 2001)
<밀레니엄 맘보>는 2000년대 초 타이베이의 젊은 세대의 불안하고 방황하는 삶을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담아낸 영화입니다. 주인공 비키(서기)는 술과 담배, 클럽 문화에 젖어 살며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녀는 나이 많은 남자친구와 불안정한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일탈을 꿈꾸기도 합니다.
영화는 화려한 조명과 빠른 비트의 음악, 그리고 몽환적인 영상미를 통해 젊음의 에너지와 동시에 그 이면에 드리워진 공허함과 외로움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서기의 매혹적인 연기와 콜린 틸리의 감각적인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립니다. <밀레니엄 맘보>는 이전의 허우샤오셴 감독의 작품들과는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지만, 도시 속에서 길을 잃은 젊은이들의 불안과 정체성 혼란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섬세하게 다루며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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